입력시간 : 2013. 11.14. 00:00

▲ 최참판댁에서 훤히 보이는 앙양들녘

평사리 상평 마을에 재현된 최참판댁에서는 대하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악양 들판(무딤이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오른편에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개치나루를 통해 배를 타고 드나들던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
화개장터를 지난 섬진강은 한결 여유로워진다. 남도대교를 지나면서부터 강변 곳곳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다. 모래가 많아 섬진강은 한때 다사강(多沙江)이라고 불렸다.
섬진강 주변에는 사도리(구례군 마산면)ㆍ평사리(하동군 악양면) 등 모래 사(沙)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배산임수형으로 풍광이 빼어나고 농토가 비옥해 살기좋은 마을들이다.
화개장터에서 섬진강을 따라 10여 ㎞를 내려가면 개치나루터가 나온다. 화개장터와 하동읍의 중간 지점이다. 이곳 강변에는 현재 평사리공원이 조성돼 있다.
지금은 나루터는 없어지고 대신 나룻배가 강 둑에 전시돼 있다. 그 왼쪽이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악양 들판이다.

악양 들판은 섬진강 주변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다. 지리산 남부 능선 끝자락인 형제봉(1115m)과 동쪽의 칠성봉 및 구제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서쪽의 섬진강 너머로는 광양의 백운산(1218m)에 가로막힌 분지다. 악양 들판 주변에 둥지를 튼 마을은 평사리를 비롯해 30여 곳.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후해 거지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구걸하는데 일 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개치나루터로 지금은 폐쇄돼 나룻배만 전시돼 있다.

악양 들판은 여의도보다 조금 작은 83만 평으로 예전엔 드넓은 모래톱과 척박한 논밭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때 섬진강을 가로막는 둑을 쌓으면서 만 석지기 부자 서넛은 나올 만한 문전옥답으로 바뀌었다. 가을 추수를 막 끝낸 황량한 들녘 한가운데는 부부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두 그루가 그윽한 눈길을 주고 받는다. 하동군은 두 그루의 소나무를 '토지'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서희송(松)과 길상송(松)으로 명명했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집필하기 전 꼭 한 번 평사리를 찾았다고 한다. 고미술을 연구하던 딸과 함께 한산사의 탱화를 보기 위해 들른 평사리 나들이 길에서 '토지'의 무대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는 '토지' 집필 중에는 한번도 평사리를 찾지 않고 오만 분의 일 지도를 보고 현장을 묘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평사리의 실제 모습과 소설 속 현장이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박경리는 '토지'를 구상하면서 애초에 염두에 둔 무대는 전라도다. 그는 생전에 '토지'의 무대를 경상도 하동의 평사리로 바꾼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성장한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만석꾼'의 토지란 전라도 땅에나 있고 경상도 안에서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그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의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정했다."

악양 들판에서 펼쳐지는 역사의 파노라마

최참판댁의 별당채.

▲ 최참판택의 별당채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는 총 5부를 완성하는데 꼬박 25년이 걸렸다. 제1부는 1969년 9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다. 마지막 제5부는 1992년 9월1일부터 '문화일보'에 연재했다. 200자 원고지로는 4만 매 분량에 이른다. 등장 인물만 해도 700여 명에 달하고 실제로 활동하는 인물은 75명 정도다. 그가 원고지와 씨름하며 우리 현대문학의 걸작을 완성했을 때는 암이라는 지병이 온몸을 덮친 뒤였다.

1897년도부터 1945년 8월15일 조국 광복에 이르는 동안 벌어진 한국 역사의 여러 굴곡과 파장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만석꾼 대지주 최참판댁의 마지막 당주인 최치수와 그의 고명딸 서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토지의 상실과 회복을 둘러싼 대하 드라마를 전개한다. 무대도 멀리 만주와 일본까지 국내외를 넘나들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는 우리의 근대사를 민초들의 생활상을 통해서 그렸다는 점, 그리고 신분 질서의 와해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겪는 백성들의 수난사를 거대한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 재현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토착적이고 전통적인 세계에 대해 뜨거운 애정을 보이면서도 근대적인 것 앞에서 몰락해 가는 군상들을 냉철하게 묘사하고, 우리의 역사를 민중 주체적 시각에서 담아내고 있다. 강렬한 민족애와 역사의 문학적 형상화, 토속어의 구사, 인물의 생생한 묘사 등으로 우리 현대 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평사리가 배경인 제1부는 소설의 도입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이 동학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낳은 자식 김환이 의붓형수인 별당 아씨와 밤도망을 치는 사건은 소설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도망간 남녀를 쫓는 긴박한 추격전이 벌어지는 한편에서는 치수를 꼬여 그의 만석지기 농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하녀 귀녀의 음모, 치수가 비명횡사한 뒤 최참판댁 재산과 토지를 노리는 그의 재종형 조준구의 행보, 마을 남정네 용이와 무당 딸 월선이의 비련 등 인간사의 오욕칠정이 쉬임없이 피었다 진다.

이 소설에서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과 섬진강이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다. 동학농민군들은 지리산에서 훈련을 하고 세력을 키운다. 김환이 별당아씨와 도망가 지리산에서 죽는 장면, 이들을 쫓는 최치수와 강포수의 추격전은 숨을 죽이게 한다. 무딤이들 앞을 흐르는 섬진강과 개치나루는 최참판댁과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특히 개치나루는 '토지'에서 주막집을 하는 월선이가 용이가 보고 싶어 마지막 배를 타고 와 악양 들판을 가로질러 평사리로 숨어들던 곳이다.

"마지막 남은 나룻배에 남은 손님은 화개로 가는 엇비슷한 삼십대 나이의 두 남자였다. 해거름에 하동 나루터에서 월선이와 함께 탔다.…날이 어두워져서 강바닥에 쭈그려앉은 월선이는 강바람을 막기 위해 모시치마를 걷어 머리에 싼다. 달이 없는 그믐밤이지만 별빛은 사방에 휘부염했다. 초여름이라고는 하나 밤의 냉기를 흠씬 머금은 강바람은 오싹오싹 살에 스며든다. 노젓는 소리, 뱃전에 와서 출렁이는 물살소리는 먼 저승길을 떠나온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하게 들리어 왔다. 들물이 팽팽하게 들어찬 강물은 별빛을 받아서라기보다 제물에 희번득이고 있는 것 같았다.…"('토지' 제1부 1권 13장)

아흔 아홉 칸 최참판댁… 소설 속에 들어온 듯

박경리를 소개하는 현수막이 붙은 최참판댁 입구.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상평 마을에는 소설 속의 공간을 재현한 아흔 아홉 칸 최참판댁이 재현돼 있다. 하동군이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8년부터 터를 다듬어 2001년에 완공했다.

재현된 최참판댁에서는 소설 속에서 만석꾼이었던 최참판댁 소유였던 악양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윤씨 부인의 생활 공간인 안채를 비롯해 최서희가 기거한 별당채, 최치수의 사랑채, 길상이 살던 행랑채ㆍ문간채ㆍ중문채ㆍ사당ㆍ초당ㆍ사주문ㆍ뒷채 등 10여 개 동을 만날 수 있다. 잘 꾸며진 고풍스런 기와집들이 소설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최참판댁 아래에는 소설 속 등장 인물인 용이네ㆍ칠성이네ㆍ김평산네ㆍ서서방네ㆍ막딸네ㆍ이평이네ㆍ관수네의 초가집 10여 채도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다.

최참판댁 주변에는 평사리문학관, 농촌문화예술체험관, 전통문화 전시ㆍ체험관, 읍내 장터 등도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해마다 200만 명에 가까운 외지 탐방객이 몰려 하동을 알리는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06년 SBS 대하드라마 '토지'가 촬영되는 등 10여 개의 드라마 촬영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마파도 2'를 비롯한 영화도 계속 촬영되고 있다.

하동군은 지난 2009년 10월10일 '문학수도 하동 선언문'을 발표한다. 군민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하동하면 떠오르는 문화예술 분야가 문학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과반수를 넘긴데 따른 것이다.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머물렀던 하동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비롯해 김동리의 '역마', 그리고 하동 출신 소설가 이병주의 '지리산' 등의 배경이 되면서 한국의 새로운 문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동은 최참판댁에서 개최하는 토지문학제와 이병주 생가와 이병주문학관에서 개최하는 이병주국제문학제, 화개장터 역마 배경지에서 역마예술제를 매년 개최하면서 문학수도로서의 이미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최참판댁 일원에서는 올해도 지난 10월11일부터 13일까지 '평사리의 너른 품, 문학을 품다'라는 주제로 제13회 토지문학제가 열렸다. 대하소설 '토지'는 하동을 문향으로 변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바탕에 평사리의 너른 들녘과 천년을 변함없이 흐르는 섬진강이 있다.

최참판댁 아래 용이네, 칠성이네 등 초가집들.

글ㆍ사진=박상수 논설실장ㆍ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