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데서라도 손을 들면 지나가는 버스가 멈추고 승객을 태운다. “아따, 저기서 쪼까 내려주쇼. 이잉!” 기사는 아무데서나 멈추고 승객을 내려준다. 버스 안에서는 산닭이 꼬꼬댁하며 날갯짓도 가끔은 한다.

완행버스는 따로 정류장을 두지 않고 출발지에서 종착지까지 가는 길에 아무데서건 승객을 태우고 내려준다. 물론 중간중간에 주요 정류장에서 좀 길게 멈추며 숨을 고르기도 한다.

4차산업이라는 용어의 등장과 숨 가쁘게 앞만 보고 가는 요즘 세대는 뒤돌아볼 줄도 아는 완행버스의 묘미를 알 수 있을까 싶다.

광주시립미술관 분관인 하정웅미술관에서 <완행버스>전이 열린다고 해서 그 느낌을 회상할 수 있을까하는 심정에 전시장을 찾았다.

15명 작가의 작품, 이 가운데 5명의 작가는 하정웅 컬렉션 중에서 나왔다. 나머지 10명의 작가는 광주를 지역으로 활동하거나 광주에서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들이다.

이들의 조합은 인간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감성과 직관이라는 두 단어를 설명할 수 있는 작품들로 분류하였다. 감성은 인간미로 설명되고 직관은 감각과 통찰의 발현으로 표현된다.

회화, 조각, 사진, 입체, 설치 등 작품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인감중심의 가치를 완행버스에 비유하여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공유와 공감의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요즘 흐름은 인간의 의식이 문명을 앞서가는 것인지, 아니면 문명이 인간의 의식을 끌어가는지조차 혼돈스러울 만큼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보면 속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작품들임에는 분명하다. 하루에 그려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속도를 보여준다. 인내심을 갖고 끈기 있게 화면과 싸워가며, 때로는 조형성을 갖추는 일에 땀을 흘렸음이 분명하다.

감성은 인간미 넘치는 완행버스처럼

한희원은 튜브에서 물감을 짜내며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평면에 입체를 만들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K도시의 풍경’이나 ‘대지’는 정말 물감튜브 수 백개를 짜내는 공력이 필요할 정도이다. 이는 도록에서 느낄 수 없는 마티에르이다.

이정록은 폐가나 폐차의 흉물스러운 모습을 배경에 하늘이라는 광활한 무한성을 사진을 통해 새롭게 조명하고 빈 공간을 수많은 황금빛 나비를 통해 생명의 빛이 탄생하는 감동을 주고 있다.

정송규는 캔버스 앞에서 가만히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소리’가 정말 들려오는 듯하다. 때로는 점의 흐름에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환희로움을 느끼게 된다.

윤남웅은 정말 민속적이다.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했다는 구약성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때로는 어디선가 꽃가마 타고 나가는 상여 위의 보개로 불리는 별갑(鼈甲)의 네 변에 꾸며지는 작은 동자(童子)와 같다.

이진경은 촌스럽다고 말할 정도로 60년대를 전후하여 볼 수 있음직한 색감과 글씨의 투박함을 통해 집에서 버리고도 남을만한 것들을 전시공간에 무작위로 재배치함으로써 정감을 자아내는 역할을 한다.

박병희의 브론즈는 크지 않지만 앙증맞다고 할 만큼 인간의 ‘동심’을 자극하는 가족의 형상을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행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순환이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선은 이제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빨래판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내려 한다. 단색화적인 작품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한결같음을 상징하는 데 닥지에 풀칠을 하고 겹치는 과정을 통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다.

진화항은 하정웅컬렉션의 출발점으로 설명될 만큼 ‘두개의 태양’, ‘미륵보살’, ‘모란’ 등에서 두 개의 조국, 생명의 기도 등을 느끼게 한다.

강운, 물위를 긋다, 34×26㎝, 192pieces

직관은 정형성과 우연성 사이에서

김재성은 정형성을 강조하기 위해 손바닥 크기의 사각틀이나 바늘 핀의 배치를 통해 시각적인 조형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역시 정송규만큼이나 인내와 끈기로 작품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작품이다.

서영기+이정은은 가장 젊은 작가로 16㎜필름, 아날로그의 대표적인 매체를 통해 빛과 벽면에서 느껴지는 착시를 느끼게 한다. 사실 벽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였다. 빛의 변화는 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손아유는 덧칠의 우연성과 느낌의 반복을 통해 작가이든 관람객이든 캔버스 안에서 알 수 없는 흔적을 찾아내게 만드는 욕구를 자극한다. 결국 속도는 사라진 채 시간과의 싸움을 벌였다.

문승근은 원형의 공에 활자를 촘촘히 배치하여 종이에 ‘활자구’를 굴려서 우연하게 드러나는 불규칙적인 글씨를 ‘무궁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과장된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모습이 수채화로 드러나고 있다.

유승우는 어린 아이들이 녹슨 못이나 돌멩이 등으로 길바닥에 무의미하게 글씨나 형상을 그렸던 것처럼 양파껍질이나 치자열매 등 식물의 즙을 짜서 한지에 바르는 과정을 ‘짓’거리를 하고 있다.

곽인식은 수채물감을 사용하여 종이에 덧칠하고 덧칠하면서 약간의 번짐 효과를 통해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을 형상화시키는 듯 하다. 그러다보면 어떤 작품은 단색화에 가까워진다.

강운 역시 의도된 우연성을 드러내기 위에 물과 물감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B4 사이즈 종이보다 약간 작은 34×26㎝ 크기의 종이에 청색물감을 이용한 4단계 정도의 원형 번짐을 보여준다. 이는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를 차용한 듯한 느낌을 준다.

언어적 유희에 실존은 사라지다

9월 23일부터 10월 22일까지 열리는 이번 <완행버스>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개별성에서 혁명적인 속도가 전혀 없는 느림의 속도를 강조한다고 할 정도로 감동을 자아낸다고나 할까.

그러한 공통점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 이번 전시 작품 간에는 미학적 충돌이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순간적인 성향에 따라 미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의 감정에 따라 작품마다 미의 매력을 느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완행버스’라는 아날로그적인 과거가 연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싸한 언어의 유희성에 속았던 것일까.

“우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詩)는 규칙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규칙은 시에서 나온다”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의 말처럼 작가들의 작품이 보여주는 미도 규칙은 아니다.

조진호 광주시립미술관장의 인사말에서 “범상치 않은 완행버스이다”라고 칭찬은 있었지만 ‘완행버스’라는 단어가 주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번 전시에서 찾으려 했던 필자의 실존적인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이라는 아쉬움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