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소속 단과대학 부설 여론조사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학내외 기관고객들의 여론조사 의뢰를 받아 주로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하는 곳이었다.

필자가 미국 유학을 떠나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아직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여론조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거의 없었고 언론의 여론조사 보도도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필자에게 여론조사 현장은 낯설고 설레는 체험장이었다.

필자는 조사자들의 전화여론조사 과정을 옆방에서 모니터링하기도 했고, 여론조사가 끝난 다수의 사례들 중 무작위로 일부 사례를 선택해 직접 전화를 걸어 전화여론조사가 실제로 실시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전화여론조사 상황에서 응답자는 자신의 답변에 대한 조사자의 대응 내용은 물론 심지어 목소리 톤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응답에 조사자가 약간만 이상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응답자는 그 이후... 질문들에 솔직한 의견을 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조사자가 자신의 신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응답자는 솔직한 의견을 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응답자의 신원을 모르는 상태에서 정확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기 위해 전화여론조사에서 전화번호는 무작위 방식으로 생성(RDD: Random Digit Dialing) 한다.

우리나라보다 민주주의가 수백 년 앞선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부터 묻는 질문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민주주의의 실천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론조사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선진국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겠다.

최근 외부 여론조사 전문업체가 우리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번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여론조사 전문업체는 교수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미리 알고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는 낯선 조사자로부터 여론조사 요청 전화를 받고서 처음부터 불쾌한 감정이 앞서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응답자가 여론조사 자체에 부정적 견해를 갖게 되는 경우 여론조사에 응하지 않거나, 마지못해 응하거나, 적극적으로 임해 의도적으로 솔직하지 않은 의견을 답할 수도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수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인 이름과 전화번호가 외부 영리기관에 건네졌다는 사실이다. 교평은 이 업체에 공금으로 전화여론조사 비용을 지급하기로 했을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응답선택이 흑백인 경우 강요된 답변일 수 있으므로 답변의 범위를 폭넓게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제3기 이사회 구성방안 관련 이른바 국민공익형이사제의 구성방안 관련한 5번 문항과 대학구성원 대표2인 대학총장 포함 관련한 8번 문항, 그리고 총동창회장 포함 관련 9번 문항에 대한 답변의 범위는 “매우찬성-대체로찬성-대체로반대-매우반대” 등으로 폭넓게 제시했다.

반면, 제2기 이사회 활동평가 관련한 1번 문항에 대한 답변의 범위는 “만족-불만족” 뿐이며, 제2기 이사회 주도하의 제3기 이사회 구성방식 관련한 10번 문항 역시 답변의 범위가 “찬성-반대” 뿐이다.

가뜩이나 여론조사는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 할 가능성이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복잡한 사안에 관해 응답자에게 매우 단순한 답을 요구하는 경우 결과를 분석하기는 편리할지 모르겠지만 분석결과가 실제 여론을 왜곡할 수 있다.

특히 제2기 이사회 관련 문항에 대한 답변의 범위만 흑백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 여론조사는 제2기 이사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편향된 시각에서 기획된 것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총장이나 총동창회장의 제3기 이사회 포함에 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편향된 시각에서 본 여론조사가 기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론조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불편부당이다. 응답자가 질문이나 제시된 답변이 중립적이지 못하고 특정 입장이 내포되었다고 인식하는 순간 그 여론조사는 실제 의견을 수집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에 교수평의회는 여론조사 결과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공금을 들여 외부 전문업체를 고용해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여론조사의 주제는 우리대학의 미래가 걸려있는, 응답자가 심사숙고하여 답해야 할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에 우편여론조사를 실시했더라면 응답률도 높일 수 있었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심사숙고하여 응답한 교수들의 보다 더 정확한 실제 여론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이번 여론조사에 총 490명의 교수가 응답했다고 하는데 모집단인 전체교수는 몇 명인지, 표본으로 추출된 교수는 몇 명이었는지 공개하지 않았으니 응답률을 가늠해 볼 수 없다. 여론조사에서 응답률은 조사결과의 신뢰성을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초교육대학의 강의전담교수나 의치대의 임상교수는 모집단인 전체교수에 포함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포함시킨 경우나 포함시키지 않은 경우 모두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론조사 도중 중간에 전화를 끊은 사례는 없었는지, 그런 경우 전체 질문 중 몇 개 이상 답변한 경우만 응답자에 포함시켰는지도 알 수 없다.

한편 이번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교육부의 임시이사 파견에 반대한다고 하니 이제부터 교수평의회는 임시이사 파견 저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그리고 학교 이미지는 구겨지건 말건, 학교는 혼란에 빠지건 말건 교육부로 하여금 임시이사를 파견하도록 언론플레이 등을 통해 의도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의사환경(pseudo-environment: 疑似環境)을 조성해온 학내 특정세력이 있다면 철저히 발본색원하여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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